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지금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 인 환 -
1956년 3월 하순의 어느 날 초저녁.
명동 뒷골목 목로주점 <경상도집>에 시인 박인환(1926~1956), 작곡가 이진섭, 가수 겸 영화배우 나애심 등이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리 곳곳은 물론 목로주점 안에도 6․25전쟁의 매캐한 상흔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진섭이 나애심에게 노래 한 곡 불러보라고 지분거렸지만 나애심은 딴청만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거나 말거나, 박인환은 주모에게서 받은 누런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흐릿한 시선으로 박인환의 손길을 이윽히 건너다보던
이진섭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종이를 낚아챘다.
박인환의 대표 시 「세월이 가면」이었다.
시를 빨아들일 듯 몇 번을 곱씹어 읽은 이진섭은 즉석에서
곡을 붙여 나애심에게 한 번 불러보기를 청했다.
삶의 고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애심은 악보를 보며 성의 없이 노래를 한 번 불러보고는 이내 자리를 떴다.
불멸의 대표곡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것이다.
잠시 뒤 성악가 임만섭과 소설가 이봉구가
왁자지껄 주점으로 들어섰다.
박인환과 이진섭은 분주하게 두 후래자(後來者)와 인사를
나누고 찌그러진 양은술잔에 거푸 막걸리 석 잔씩을 권한 뒤 이진섭이 임만섭에게 악보를 건네주었다.
두세 차례 악보를 찬찬히 읽은 임만섭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렁찬 테너로 「세월이 가면」을 열창했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명동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우르르
<경상도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청중들의 열렬한 앙코르 요청에 임만섭은 다시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켜더니 「세월이 가면」을 재창했다.
노래는 금세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은 드물게 성악곡으로 보급되었는데, 세인들에게는 「명동엘레지」로 널리 알려졌다.
훗날 애잔한 음색의 대중가수 박인희가 원제인
「세월이 가면」으로 리바이벌하여 크게 히트시켰다.
<경상도집>에서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10년 전에 타계한 첫사랑 여인의 기일을 맞아 망우리공동묘지를 다녀왔다.
세월이 가면」은 피를 토하듯 그 첫사랑에 얽힌 애절한 추억을 한 올 한 올 반추한 정한(情恨)이었다.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가랑잎이 나뒹구는 옛 연인의 헐벗은 묘지를 바라보던 젊은 시인의 적막한 심경이 시공을 건너와 가슴을 엔다.
그러나 사람은 가더라도 두 연인의 절절한 사랑이
사라질 리야 있겠는가.
그 처연한 심사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을...
이 시를 마지막으로 박인환은 며칠 뒤인 1956년 3월 29일,
자택에서 잠들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사인은 과음에 의한 심장마비!!
(요절이 애통하기는 하지만 이 얼마나 부러운 죽음인가!)
이 땅에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시 세계를 펼친 열정적 시인이 만 30세의 너무나 아쉬운 나이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춥고 배고픈 시절임에도 언제나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명동을 누볐던 ‘명동신사’ 박인환은
동료 문인들의 청을 받아들인 미망인의 양해 아래
망우리공동묘지 옛 연인의 묘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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